한의학의 표현에 ‘과학화’, ‘표준화’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적 접근(특히 인류학)이 필요하다.
2017112003 김민정
한의학과 양의학, 그 양자 비교에 대상의 ‘타자화’는 유리될 수 없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비교의 기준에는 그 사회가 더 비중을 두는 가치관과 문화가 영향을 줄 수 밖에 없다. 이는 그 기준을 통해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비교의 대상을 ‘타자화’ 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타자화’는 특정 대상을 ‘다른’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이질적인 집단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타자화’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함에 그 근거를 제시했다. 대표적인 예로, 유럽에서 그들의 문화를 기준으로 모든 인류집단을 ‘문명’과 ‘야만’으로 구분했던 것과 ‘유색인종’이라는 단어가 있겠다.
요즘 한의학과 양의학을 비교하는 글을 볼 때면, 상대적으로 힘이 더 큰 양의학적 관점 (과학)을 잣대로 한의학을 ‘타자화’시키는 경향(비과학)이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학이라는 잣대 대신 한의학과 양의학을 비교할 공정한 기준을 갖출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그들이 체험한 시대적 특수성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특정한 사회에 하나의 구성원으로 속해있고, 이는 주된 헤게모니의 압박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까닭이다. 이것은 한의학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우리의 시선은 근대화된 ‘가시성’의 세계이지만 한의학의 개념(대표적으로 精,氣,神)은 실체가 없다. 따라서 우리의 비교는 헤게모니를 띠는 관점에 의해 한의학을 예단하고 규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기준을 갖출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비교 기준을 갖추려는 의도를 내려놓음으로써 한의학과 양의학에 대한 병치를 이룰 수 있으며, 이는 한의학과 양의학의 인식과 그 실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나는 이제 양자의 비교불가능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 후, 병치의 방식과 그 과정에서 사회과학의 필요성에 대해 서술하려 한다.
한의학과 양의학의 비교불가능성이 시사하는 병치의 가능성
한의학과 양의학 모두 의학이라는 접점이 있다. 모든 인류는 그 인간집단의 규모나 기술의 발전과는 무관하게 ‘질병에 대한 체계적 대처 방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체’라는 접점에도 불구하고 그 갈라져 나온 줄기들의 간격은 너무나도 크며, 지역과 기후에 따라 다원화 되어있다. 예로, 양의학은 세계와 몸을 분리한 개별성을 한의학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의학은 세계와 세계에 열려있는 사람의 관계성-기의 흐름-을 강조한다. 이러한 양자의 다른 인식은 진단과 치료에서 가시화된다. 즉, 그들의 세계관에 가장 적합한 의료를 해왔다는 것이며, 이것이 양의학과 한의학의 비교불가능성에 대한 첫번째 이유이다.
또한 의료는 사회와 불가분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의료가 속한 사회는 각각 근대화를 다르게 경험했고, 이것은 양의학과 동아시아 의학뿐만 아니라 중의학과 한의학이 그들의 사회에서 존재하는 방식에 차별성을 뒀다. 중의학은 병원화를 통해 표준화를 이뤘고 한의학은 한의원(개인) 위주의 진료와 그로 인한 이론과 진단의 다양성을 이뤘다. 따라서 그 간격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기준을 통한 비교가 불가능한 두번째 이유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비교의 잣대를 기각한다. 우리는 양자를 병치해야한다. 여기서 병치는 한의학의 발전 방향을 ‘표준화’, ‘과학화’에만 집중시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나는 ‘표준화’, ‘과학화’가 사실은 이미 한의학의 배경은 뒤로한 채 시대의 헤게모니를 따라가기 위해 본질화되어있는게 아닌가하는 의문을 표한다. 그러나 ‘표준화’와 ‘과학화’를 온전히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다. 의료는 사회 속에 존재하며 의료 속에 사회는 내재되어 있다. 이를 거스르게 되면 사회의 신뢰를 잃고, 의료를 이용하려는 환자들은 감소하게 되며, 사용되지 않는 의학은 도태된다. ‘표준화’와 ‘과학화’가 어느정도는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이 둘은 한의학이 현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지 목적 그 자체가 아니다.
우선적으로 한의대 학생들은 ‘표준화’가 강조된 교육을 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론의 기본적인 틀은 공통되게 갖춰야함이 그 까닭이다. 하지만 졸업 후에는 표준화보다 임상 학회들을 통해 효능 있는 이론과 치법에 대한 모색과 공유를 통해 다양성을 접해야 한다. 이는 한의학이 가진 강점이기 때문이다. 김태우, 한창호의 Medicine within Society, Society within Medicine를 가져와 그 설명을 덧붙여 본다. “만약 중국의 중의학과 같은 표준화가 한의학에서도 추진되었다면 한국의 한의학은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존재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상의학, 형상의학, 소문의학, 사암침 등 다양한 몸에 대한 이해와 질병 대처의 시도들은 종파주의로 치부되면서 명맥을 유지하지 못했거나, 극심한 변화에 직면해야 했을 것이다.”
병치의 과정에서 필요한 사회과학 - 해설자가 필요하다.
한의학의 기본 이론은 가시화되지 않고 치법을 통한 인체의 반응을 공유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가시성과 인과의 관계를 내세우는 현대인의 사유체계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따라서 현대인은 1:1의 방식으로 한의학과 양의학을 비교하려 하는데, 나는 이 상황이 한국문학의 현실과 닮아있다 생각한다. 걸출한 문학이(특히 시) 많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문학은 세계에서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 이것은 한국문학의 섬세한 감정 표현과 미사여구를 번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답답하다.’라는 감정을 표현할 영어 단어가 없는 것과 ‘푸르다’와 ‘퍼렇다’의 차이를 표현할 마땅한 단어가 없는 것이 있겠다. 한의학의 이론이 우수하며 임상에서의 실제 또한 효과적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를 1:1로 대응시킬 과학 개념이 없으며 이는 精과 神 또한 마찬가지다. 이것은 비교가 아닌 병치에서도 드러나는 문제이다. 精, 神, 氣라는 단어 그대로를 사용하며 양의학과 별개성을 가지고 접근한다고 해도 문화적 배경을 모르기 때문에 타 집단은 한의학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한의학을 표현하는 데에 다양성이 있어야 한다. 나는 그 다양성의 하나로 사회과학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사회과학 중에서도 특히 한의학을 사람들에게 ‘해설’해줄 해설자로서의 인류학자가 필요하다. EBM으로 대표되는 ‘과학화’, ‘표준화’가 언어의 번역을 도맡는다면, 인류학자는 번역된 언어의 내용이 잘못 이해되지 않게 문맥을 설명해주는 해설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한의학이 겪어온 문화와 사회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존재하던 한의학이 다른 문화에 받아들여질 때 우리의 관점과 해설의 역할은 더 크다. 특히 의료기반이 취약한 아프리카는 의료접근정을 중시하므로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드는 동양 의학이 유리하게 작용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한의학을 수입할 때. 단순한 지식 습득만을 한정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점까지 포괄한다는 것이다. 만약 EBM 즉, 과학화와 표준화로 범벅되어 있는 한의학이 아무런 맥락 설명 없이 그들에게 수입된다면 그 모호성으로 인해 더 큰 영향력을 갖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학자의 설명이 덧붙여진다면 어떨까? 한의학이 보다 더 경쟁력을 갖출 수 있지는 않을까? 또한 단순한 인류학자보단, 의료인류학자가 더더욱 구체적으로 한의학을 서술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최근 한의학의 ‘과학화’,’표준화’ 추세는 현대와 전통을 상반된 개념으로 놓고, 특히 전통을 ‘타자화’하려는 경향이 짙어보인다. 나는 이 이분법적인 결론을 낳는 기준을 기각하는 바이며 ‘양자의 병치’를 주장한다. 그리고 병치의 정확한 의도 전달을 위하여 현대 속 전통, 그리고 그 정통성을 살리기 위한 인류학자로서의 한의사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 주장의 결론이다.
각주
1) 타자화(他者化)는 특정 대상을 말 그대로 다른 존재로 보이게 만듦으로써 분리된 존재로 부각시키는 말과 행동, 사상, 결정 등의 총집합이다. 이는 사회학의 용어에서 출발하였으며 철학, 역사, 정치학 등에서의 적용도 가능하다. 타자화가 문제시되는 이유는 대상의 이질적인 면을 부각시켜 공동체에서 소외되게끔 만들고 대상을 하나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스스로의 목소리를 잃게 만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출처:wikipedia]
2) 직접적으로 비교될 수 없는 이론의 명제와 전반적인 내용을 가진 과학적 이론간의 관계, 모든 관측치가 이론-관련적이고, 그리고 귀납적, 논리실증주의적, 반증주의적인 과학에 의해 가정된 이론-중립적인 자료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되는 과학적 이론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 토마스 쿤(Thomas Kuhn)과 폴 페이어라벤드(Paul Feyerabend)와 가장 많이 연결되는데, 이것은 종종 아주 일반적인 '상대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가정되기도 한다. 만일 이론이 항상 이론-중립적인 자료언어의 측면에서 엄격하게 비교되지 않는다면, 경쟁적인 이론의 주창자들은 서로의 견해를 평가하고 그 기반 위에서 결론에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대화를 해야 한다. (사회학사전, 2000. 10. 30., 사회문화연구소)
3) Medicine within Society, Society within Medicine : An Anthropological Exploration of Korean Medicine in South Korea and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in China Tae-woo Kim1 , Chang-ho Ha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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